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문단 편집) === 개인적 일화와 인간성 === * [[양말]]의 효용성이 낮다고 불평하였는데, 아마도 아인슈타인이 [[발톱]]을 깎지 않아서 양말에 구멍이 자주 나서로 추측된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2018_CKS_16447_0038_000(don_quixote_and_the_bible_are_my_favourite_books_berlin_15_march_1926).jpg|width=100%]]}}}|| * 1926년 3월 15일 그에 편지에 의하면 가장 좋아하는 책은 [[돈키호테]]와 [[성경]]이었다고 한다.[[https://www.christies.com/features/15-things-you-might-not-know-about-Albert-Einstein-9162-1.aspx|출처]] 잠자기 전 셔츠와 파자마도 입지 않은채 침대에서 누워서 본게 돈키호테라고 한다. 휴식을 취할때 가장 많이 보고 가장 즐겼다고 한다. 생전에 [[로렌스 스턴]], [[토마스 만]], [[조지 버나드 쇼]], [[헤로도토스]], [[아리스토텔레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등 다양한 책들을 읽었다. 또 [[요한 볼프강 폰 괴테]]와 [[아르투어 쇼펜하우어]]를 무척이나 존경했다. 그가 쓴 책들을 다 모아 서재에 정리해 놨을 정도다. [[https://www.weforum.org/agenda/2019/02/5-favorite-books-of-albert-einstein?fbclid=IwAR1oKi2oNXHCCrVoEHtoMc4Bx69FFi0VFj2p9Ooe0kZicjBfTfBi6AXwVG0|출처]] 아인슈타인은 생전 여러 문학을 무척 사랑했고 같은 독일계인 괴테의 경우 그의 흉상을 소장하며 저작을 애장했다. 아인슈타인은 괴테를 "역사상 가장 똑똑하고 현명하다"고 평했다. * [[흡연자]]였고 파이프 담배를 곧잘 피웠다. 담배를 피울 때면 잡생각이 사라지고 냉정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 '뇌에 전화 번호를 넣을 바에야 다른 지식을 넣는 게 낫다'며 자신의 전화 번호도 적어두고 평생 기억하지 않는 일화도 있다. 전화 번호 가르쳐 달라고 할 때마다 일일이 수첩을 뒤적거렸다고 한다. 그리고 노년엔 자기 집 주소를 잊어버려서 비서격인 사람에게 주소 가르쳐달라고 전화를 했다는 말도 있다. * 여동생인 마야가 말하기를 마야가 태어났을 때 함께 놀 수 있는 동생이 태어났다는 말을 두 살 때 들었다고 한다.[* 근데 아인슈타인은 4~5살 되기 전까지 말을 거의 못했다. 그리고 나서도 말을 더듬거려서 부모가 "얘는 안 되겠구나" 하고 포기했었다. 상술된 것처럼, 아인슈타인은 어학 시험에 여러 번 낙방하였는데 이러한 점이 영향을 미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여동생을 처음 보았을 때 '''바퀴'''는 어디 있냐고 물었다고 한다. 팽이로 동생의 머리에 구멍을 내려고 한 적도 있다. 마야 曰 "'''천재 오빠를 둔 동생의 두개골은 단단해야 해요'''." * 나름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인해 온 가족들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녀야했던 시절이 있었다. [[독일]]에서 살 때는 유능한 [[전기공학|전기공학자]]였던 아버지와 삼촌이 합작해서 전기제품을 제작하는 회사를 차렸으나, 경쟁사의 사장이 고위 장교인 형의 빽을 이용해 아인슈타인 아버지의 회사의 거래처들을 빼돌려서 실패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아직 [[김나지움]]을 다니던 아들만 독일에 남겨두고 [[이탈리아]]의 [[밀라노]]로 이주했으나[* 참고로 아인슈타인 자신은 상술한 당시 [[독일]] 교육 환경의 권위주의적인 분위기에 질려서 자퇴하고, 가족들이 있는 [[밀라노]]로 갔다. 당시 [[이탈리아]]는 [[이탈리아 통일 전쟁]]의 여파로 인한 [[자유주의]]적인 분위기가 만연해있어서, 교육 현장에서도 권위주의적인 부분이 거의 없었는데, 아인슈타인은 이런 환경에 대단히 만족스러워 했다.], 거기서도 파산해서 끝내 온 가족이 [[파비아]]로 재차 이주해야했다. 이쯤 되면 단순히 빽이 문제가 아니라 기본적인 경영 능력이 없었던 모양인데, 이런 아버지때문에 아인슈타인 본인은 한동안 이탈리아에서 살았다. * [[뷰테인]]을 냉매로 쓰는 [[냉장고]](EinsteinSzilard 냉장고)를 발명한 적이 있다. 실질적으로 시제품을 만든 것은 미국의 물리학자 레오 실라르드(Leo Szilard). 효율이 좋지 않고, 더 좋은 냉장고가 발명되어 묻혔지만, 움직이는 부품이 없어 안정적이기 때문에 [[증식로]] 냉각에 사용되었고, 최근에는 효율이 급격히 높아져 주목받고 있다. * 한 번은 아인슈타인이 노벨상을 받고 인기가 높아지게 되자 큰 강당 같은 곳에서 대중들을 상대로 한 달 동안 강연회를 열었다. 강연회는 아인슈타인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러자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운전 기사에게 자신과 비슷하게 분장을 하게 한 다음 "어차피 저 사람들은 내가 말하는 말이 뭔 뜻인지 모를 거니까 나보다 말재주 좋은 네가 강의해라"고 했고 운전 기사가 강의를 대신 하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강의를 진행하다가 물리학 전공자가 질문을 걸어오면 "이건 내 운전 기사도 풀 수 있는 문제다"면서 운전 기사 복장을 하고 있던 진짜 아인슈타인을 불러내 문제를 풀게 했다고...다른 판본에서는 운전 기사가 강연회에 함께 참석하다 보니 강의 내용을 잘 외우고 있어서 가능했다는 설도 있다. 또한 아예 아인슈타인이 아니라 [[막스 플랑크]]가 나오는 버전도 있다.[* 롤프 도벨리의 「스마트한 생각들」에서 인용한 찰리 멍거의 "운전사의 지식"에 관한 이야기도 이 버전(플랑크, 강연 외운 운전사)을 따르고 있다. 어쨌든 여기서 유래한 "운전사의 지식"은 [[좆문가|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만 하는 지식]]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 예술 분야에서 상당한 수준의 [[바이올린]] 연주자였으며, 모차르트의 곡을 선호했다고 한다. 평소의 취미 활동도 바이올린 연주와 [[요트]]를 타는 것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모차르트]]의 곡들을 [[쾨헬 번호]]로 정리한 사람이 그의 12촌 지간인 음악학자 알프레드 아인슈타인(Alfred Einstein)이다. * 하루는 외출을 나갔다가 갑자기 비가 내리자 쓰고 있던 중절모를 벗어서 코트 안에 감추고 모자가 비에 젖지 않게 했다고 한다. 이웃 사람이 그것을 보고 비오는데 왜 모자를 벗어서 머리까지 젖게 만드냐고 하자 "머리를 감는 게 모자를 세탁하는 것보다 간단한 일이다"라고 답했다고.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oJG8cmlkPuw,width=480, height=280)]}}}|| * 이 영상은 몇 안 되는 아인슈타인의 육성이 담긴 영상이자 아인슈타인이 농담을 하는 장면이다. >기자 1: (서투른 독일어로) 교수님, 다시 미국에 오시니 기분이 좋으십니까? (Professor, Freuen Sie sich hier in Amerika wieder zu sein?) >아인슈타인: 당신을 보니 그렇구먼![* 누가 봐도 독일어를 못 하는 기자가 독일어로 질문을 하니 아인슈타인이 답변을 하기도 전에 조금씩 웃는 사람들이 보인다. 아인슈타인은 '당신의 서투른 독일어를 보니 웃겨서 기분이 좋다'라는 뜻으로 기자를 가볍게 놀렸다.] (Wenn ich Sie sehe, sicher!) >(일동 웃음) >기자 2: 교수님께선 [[금주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What do you think of prohibition, Professor?) >아인슈타인: 어차피 난 술 안 마시니 상관 안 한다네. (Ich trinke nicht also ist mir das ganz gleich!) * 자기 집의 식탁보로 머플러를 짰다면서 이웃집에 전화를 걸어서 자랑한 적도 있다고 한다. 천재는 곧 괴짜라는 편견에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그래도 실제로는 이웃 초등학생의 수학 숙제를 도와주면서 소일거리를 하는 자상한 모습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그 초등학생은 아인슈타인을 저명한 물리학자가 아닌 그냥 친절한 이웃집 할아버지 정도로만 알았다고 한다. * 아인슈타인은 정치적으로 [[사회주의]]자였다. 한국인들에게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위인들 중에 "어? 이 사람이 사회주의자였어?" 하는 반응이 나오는 두 사람이 [[헬렌 켈러]]와 아인슈타인이다. 1949년 미국의 사회주의 저널 '먼슬리 리뷰(Monthly Review)' 창간호에 유명한 글 "왜 사회주의인가?"를 기고한 적이 있다. [[http://monthlyreview.org/2009/05/01/why-socialism|영어 전문]], [[http://imjohnny.egloos.com/2112507|번역문]]. 또 [[민족주의]]를 강하게 혐오했다. 아마도, [[나치 독일]] 시대를 보냈던 그는 [[전체주의]]적인 사상에 극도의 거부감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 [[바둑]]을 둘 줄 알았다고 한다.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일할 때 어떤 일본인에게서 배웠다고 하는데, 일본 기원에서 아인슈타인의 초단을 인정했다고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http://iqbaduk.com/xe/113284|#]] *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유진 위그너는 폰 노이만과 아인슈타인 중 누가 더 천재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내 인생에서 똑똑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플랑크, 폰 라우에, 하이젠베르크를 알았고, 폴 디랙은 제 형제였습니다. 실라르드 레오와 에드워드 텔러는 저와 가장 친한 친구였습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도 좋은 친구였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폰 노이만만큼 두뇌회전이 빠르고 날카로운 사람은 없었습니다. 나는 종종 그 사람들 앞에서 이런 말을 했었고 아무도 나에게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중략)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이해력은 폰 노이만의 이해력보다 더 깊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폰 노이만보다 더 핵심을 관통했고 더 독창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아인슈타인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일에 특별한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그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두 가지는 특수 상대성 이론과 일반 상대성 이론입니다. 반면에 폰 노이만은 그런 영민함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독창적인 것을 전혀 만들어 내지 못했습니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image.hnol.net/201102111316417591-167450.jpg|width=100%]]}}}|| * 아인슈타인의 [[메롱]] 사진에서 전해지는 바로는,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본인이 이 사진은 반드시 유명해질 거라면서]] 일부러 [[혀]]를 내민 우스꽝스러운 포즈를 취했다고 한다. 뭔가 괴짜 같은 과학자의 인상을 잘 표현한 사진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후일 NHK스페셜 '아인슈타인의 세계' 제작팀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원래는 자동차 뒷좌석에 세 사람이 타고 있는 것을 아인슈타인 부분만 편집한 것이라고 한다. 모 행사를 마친 후 찌푸린 표정으로 차에 올라탄 아인슈타인을 보고 신문기자가 "아인슈타인 박사님, 포즈라도 취해 주십시오!" 하니까 저런 표정을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훗날, 이 사진 원본은 경매장에 나왔는데 '''한화 약 9,400만원'''에 낙찰되었다.[[https://www.asiae.co.kr/article/2009062207174664277|#]] 그의 괴짜기질이 만만치 않은 돈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external/wmn.hu/Einstein-Frank-Aydelotte-and-wife-3.jpg|width=100%]]}}}|| [* 옆에서 웃는 사람은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장을 지낸 바 있는 프랭크 아이델로트(Frank Aydelotte) 박사. 반대편은 그의 아내이다.] 이 사진에 대해 [[학교대사전]]은 "천재들은 왜 [[요절|일찍 죽을까]]? [[장수|안 죽고 오래 살면]] 노년에 이런 사진이 남기 때문이리라"라고 평한 바 있다. ~~그 예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도 추가해야 할 것 같다.~~ *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과학자 [[마리 퀴리]]와 절친한 사이였는데, 마리가 남편 [[피에르 퀴리]]와 사별한 이후 동료 과학자인 폴 랑주뱅과의 불륜 의혹에 휩싸였을때도 적극적으로 그녀를 변호하며 감싸주었다고 한다. 문제는 마리를 변호해주겠답시고 했던 말이 '그녀(마리 퀴리)는 똑똑하고 열정적이지만, 누구에게나 치명적일만큼 매력적이지는 않다.' 라는 실드치는건지 까는건지 헷갈리는 발언이었다. * 코미디언이자 연출가 [[마이크 니콜스]]랑 친척관계긴 하나 10촌 관계라 그냥 남이다. * 2018년 12월 4일 , 뉴욕 경매에서 1954년 1월, 죽기 1년전에 철학자 에릭 구트킨트 (Eric Gutkind,1877~1965)에게 쓴 편지로 '종교라는 건 가치없으며 유태교도 마찬가지다. 종교는 미신 뿐이고, 유태인도 평범한 민족이다....'라고 썼다. 이 편지는 경매로 280만 달러에 낙찰되었다. * 독일물리학회(Deutsche Physikalische Gesellschaft;DPG)에서 뛰어난 이론 물리학자에게 수여하는 막스 플랑크 메달(Max Planck Medal)의 첫 수상식(1929년)에서 막스 플랑크 본인과 함께 첫 수상자가 되었다.[[https://repository.aip.org/islandora/object/nbla%3A293645|사진]] * 1919년의 에딩턴 실험 이후 갑자기 유명해진 [[상대성 이론]]에 대해 전 세계에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 12명을 넘지 않는다는 소문이 미국 기사를 통해 유명해졌는데, 아인슈타인이 1921년 하임 바이츠만(Chaim Weizmann)과 함께 미국에 방문하자 미국 기자에게 소문의 진실에 대해 질문받은 적이 있다. 그는 질문에 웃으며 "제가 가는 곳마다 누군가가 그 질문을 하지만, 터무니없는 말입니다. 과학에 충분히 훈련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론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놀랍거나 신비로운 건 없습니다. 그 길을 따라서 사고를 훈련한 이들에게는 간단한 일이며, 그런 사람은 미국에 많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When asked regarding the statement that there were only twelve persons in the United States whose mentality was sufficient to grasp the principles of his theory, Prof. Einstein laughed. "Everywhere I go some one asks me that question", he said. "It is absurd. Anyone who has had sufficient training in science can readily understand the theory. There is nothing amazing or mysterious about it. It is simple to minds trained along that line and there are many such in the United States." (Chicago Daily Tribune, May 3, 1921.)[[https://chicagotribune.newspapers.com/search/|#]]]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